# Positive Ko
요행을 바라지 않는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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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개발자가 되었나?
# 기 起
아버지께서는 개발과 무관한 업을 하시지만 프로그램을 개발해 배포한 이력이 있으시다. 오빠는 백엔드 개발자다. 그런 아버지와 오빠를 보고 자란 나에게 개발의 문턱은 낮아 보였다.
어렸던 나도 자연스럽게 오빠랑 아버지가 컴퓨터를 두드리는 걸 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많았다. 그 당시 코딩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포토샵과 HTML을 이리저리 굴려 학급 홈페이지를 만들었었다. 초등학생인 나의 첫 웹 개발이자 ^^7, 지금 돌이켜보니 자못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승 承
사실 온갖 것에 관심이 많고 도전girl이었던 나였기에 개발은 마음 한 켠의 추억이 되어 잊혀진다. 그 후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으로 삼았고, 잠시 곁길로 빠져 영화 미드를 1,000편 넘게 보는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었다. 또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선 음악 페스티벌 스태프가 되기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집을 지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 튀링겐주에서는 오래된 성에 살며 음악 연주회를 열며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즐기는 베짱이가 되었다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는 아몬드와 올리브 농사를 지으며 종국에는 못 다루는 연장이 없는 다이나믹한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취업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각종 패션 바잉 엠디, 온라인 엠디 업무를 경험해보다 영업직으로 패션업에 안착한다.
# 전 轉
그러다 탈-패션화를 경험하는 순간이 온다.
여기서 일한 것은 행운이었고 직무도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규칙의 모사품이라는 생각이 컸다. 당시 내가 하던 일은 무수히 많은 글로벌 방침의 복제,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규격화된 일에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누군가로 갈아 끼워 넣어져도 될 일이라는 생각에 공허함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규칙을 따르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던져있던 삶이었다.
퇴사하기 직전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자유롭게 팀원들 간 컨센서스를 맞추고 실행방안을 내던 프로젝트를 맡았다. 회사 업무가 고됐고 그것 또한 고됐지만, 결과는 제일 좋았고 재밌었다. 내 기준에 좋은 일이란, 고되지 않은 일이 아니라 고되더라도 나의 주도성이 크고 성취감이 큰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내가 생각하던 삶을 밀어붙여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설국열차>에서 요나가 열차 문을 열고 나가 북극곰이라는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나 또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었다.
# 결 結
굽이 굽이 돌아 개발자의 길로 왔다. 지금은 개발자로서 또 다른 기승전결을 펼치고 있다.
# 앞으로의 마음가짐
- 작지만 꾸준히
적당한 열등감과 적당한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공부해보려고 한다. 아직 미물에 불과한 개발자에 결코 자랑이 되지 않는 실력이다. 지금은 아주 작은 것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꾸준히 자랑으로 삼아 그 작은 것들의 총합이 절대 가볍지 않은 개발자의 삶을 살고 싶다.
- 사람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싶다. 파리에서 우리가 만든 집을 다 같이 바라보며 ‘우리가 힘을 합해 뭔갈 만들었어! 이건 멋지고 신나는 일이야!’라고 되뇌었던 순수한 마음과 인류애를 잊지 않고 싶다.
- 인생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삶에서 나를 소외시키고 싶지 않다. '피곤한 삶이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자기 착취보다는 현재 속에 살아있는 삶을 느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고 싶다.
- 요행을 바라지 않기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은 클리셰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 성립하는 것은 1%의 재능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근본은 복세편살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살아오면서 열심히 노력한 것의 결과는 항상 결코 뻔하지 않았던 경험 덕분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거야!’라는 생각보단 그저 그게 삶의 옳은 방향이라고 믿기에 요행을 바라지 않는 개발자가 되겠다.